Critic by Curator Boseul Shin

지금, 여기-이방인으로서의 관찰자
신보슬(큐레이터)

외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이방인’의 느낌을 잘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것인지 실제로 피부에 와 닿게 경험해본 적이 없다. 물론, 업무나 휴가 등을 이유로 종종 외국에 가곤하지만, 일주일 혹은 열흘 안팎의 짧은 체류기간 동안의 만나는 낯섦은 불편함이라기 보다는 ‘돌아갈 곳 있는 자’의 여유로운 관찰과 즐거움에 더 가깝다. 그래서, 외국에서 유학하며 작업하는 작가들이 느끼곤 한다는 ‘이방인’의 감정을 그저 짐작할 따름이다. 어쩌면 김우진이 작업을 통해 이야기하려 했던 ‘지금, 여기’라는 것에 대해 100퍼센트 공감하고 이해할 수 수 있을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작가가 작품에 대해서 소개하며 인용한 제임스 조이스의 말은 ‘(김우진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공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야기에 닿을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했다.

“나로 말하자면, 항상 더블린에 대해서 쓴다. 왜냐하면, 더블린의 중심에 이를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도시들의 중심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것 안에 보편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가 ‘더블린에 대해서’ 썼다면 김우진은 런던 ‘안에서’ 자신이 관찰하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물론 그것은 런던이라는 도시의 외관에 대한 관찰이 아니다. 작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 안에서 느끼는 이방인 같은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이방인으로서의 자신의 처지와 느낌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대상에 거리를 두고 건조하게 풀어간다. 그래서 언뜻 보면 김우진의 작업은 그동안 많이 보았던 인터렉티브 작업들과 유사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테크닉에 집중하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의 느낌에 방점을 찍은 작업은 분명 자신만의 분명한 작업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는 이런 김우진의 작업태도를 잘 보여준다. 전시장 코너 한  켠에 인물 한명이 등장하여 벽을 두드린다. 출구가 있는 것 같지 않은 공간에 갇혀 있는 듯 보이는 인물은 여기저기 화면 속을 이동하며 벽을 두드린다. 그것은 ‘나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도 같고, ‘거기 누구 있어요?’라고 묻는 것도 같다. 하지만 쉽사리 빠져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Knok, Knok!, Knok, Knok..”을 외치는 목소리와 벽을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인물의 등장과 퇴장. 이어지는 왼쪽 코너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머리위에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듯 점프를 하고 있다. 그들의 행동은 묘하게 “Knock, Knock”이라는 사운드와 어울린다. 오른쪽 화면에서 벽을 두드리며 출구를 찾는 행동과 이어지며 화면은 마치 두 개의 이어진 공간처럼 보인다. 오른쪽 화면의 인물은 왼쪽 무리의 사람들에게 닿으려 하지만, 왼쪽 화면에 있는 사람들의 무리는 무심히 머리위에 무엇인가를 향해 점프만 하고 있다. 이 작업을 위해 김우진은 배우들을 섭외하여 ‘무엇이 위에 있는 것처럼 점프하시오’라는 명령어를 제시하고, 연기하게 했다고 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촬영된 이미지를 중첩시켜 마치 하나의 공간에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 실제로는 모두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촬영된 것이지만, 모호한 공간 안에 편집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구성해 낸다. 허공을 향해 점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끊임없이 벽을 두드리는 사람의 모습에서 다수로부터 고립된 개인과 개인과 무관한 다수의 모습을 보았다면, 지나치게 작가의 상황에 몰입된 것일까?

에서 작가가 다수에 속하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고 있는 인물에 스스로를 이입한 것처럼 보였다면, <___ in="" the="" wonderland="">에서는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다수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화면 가운데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인물이 있다. 그리고 그 인물을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마치 고스트처럼 반투명으로 처리된 스쳐가는 사람들을 따라서 화살표가 등장한다. ‘David Kunst, b. 1920. chef’, ‘ Amy Hugh, b. 2001, Tutor’, ‘Liz Taylor, b. 1940, Taxi driver’ 와 같은 정보가 뜬다. 하지만 작가가 기입해 놓은 그 정보들은 거짓 정보이며, 화면 속 인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엉터리 정보들이다. 누구나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이나 직업 같은 것을 상상해보는 그런 생각. 그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혼자만 무리에서 빠져나와 구경하듯 지나치는 사람들에 대해 상상해봤던 경험. ‘그래, 나도 그래본 적이 있지’라는 관객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화면은 점점 줌 아웃이 되면서 화면 안에 화면, 화면 안에 화면들, 그리고 화면 속 뒷모습을 보이고 있던 인물이 화면 밖으로 나와 화면을 바라보는 액자안의 액자 구성으로 관객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

액자구성은 김우진이 즐겨 쓰는 방식이다. 에서도 갤러리 공간과 유사한 느낌의 공간을 꾸미고 배우들에게 ‘갤러리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오’라는 지시문을 제시하고, 크로마키 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촬영한 후 촬영한 영상을 화면 안 갤러리를 닮은 공간에 마치 회화작품처럼 설치한다. 관람객이 관람하고 있는 공간과 유사한 모양의 공간 안에서 그림을 보듯 관람객 스스로의 움직임을 보게 된다. 이 작품은 보는 이와, 보이는 대상의 관계, 시선에 관한 꽤 묵직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김우진 스타일로 가볍게 풀어낸다. 

영상작업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액자구성과 시선, 군중에 대한 관심은 입체작업에서 좀 더 다양하게 펼쳐진다. 일상을 기록한 사진 중에서 길에서 만난 주변 사람들, 인터넷이나 잡지에서 찾은 일반이의 사진들을 재조작한 다음 프린트 작업으로 연결시킨 나 <40 martyrs="">는 그/녀의 영상작업이 가지고 있는 심플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인물에 대한 흥미로운 공간구성을 펼쳐낸다. 프레임 처리된 유리판 위에 화이트 수성물감을 사용하여 그려낸 인물들을 바닥에 설치한 이 작업들은 관객이 움직이고 이동하는 각도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보인다. 거리를 스쳐갈 때 만나는 사람들의 인상이 크고 작게 다가오듯 각기 다양한 사이즈의 액자 안 유리에 그려진 인물들의 얼굴은 관객의 동선에 따라 중첩되기도 하고, 흐릿하게 지나갔다 또렷하게 다가오면서 거리에서의 경험을 전시장 안에 새롭게 구성한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브제들을 사진을 찍은 다음, 이를 다시 작가가 설정한 무대 위에 올려 촬영하는 사진 작업 역시 작가가 관심 갖는 대상에 대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예쁜 빨간 색이 칠해진 현관문을 찍은 나 노란색으로 단장한 어느 집의 현관인 듯 보이는 에서처럼, 굳이 시선을 주지 않는 대상들이지만, 작가에 의해서 주인공이 되고, 거기에 있었음을 ‘굳건히’ 증명하는 듯 보이는 사진연작은 일상의 소소한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작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것처럼 영상에서 페인팅, 설치에서 사진까지 김우진은 다양한 매체들을 활용하여 작업한다. 최근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이처럼 다양한 매체를 두루 넘나드는 것은 흔한 경우이기 때문에 이를 김우진 작가만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소리의 색깔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영상에서 설치가 자연스럽게 보이고, 사진을 통해 보여주는 일상의 소소한 대상들에 대한 시선이 인물위주의 영상과 사진을 보완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은 작가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 공간에 깊숙이 들어가 있지 못한 채 여전히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에 있음에도 ‘여기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의 시선은 표류하듯 세상을 훑어간다. 그리고 사람들이 시선을 주지 않는 곳에 시선을 머무르며 살핀다. 여기와 저기 그 어딘가에 김우진이 있었다. ‘특정한 것 안에 보편적인 것’이 있다던 제임스 조이스의 말은 옳았던 것 같다. 김우진은 런던에서의 이방인으로서의 삶에서 작업을 풀었지만, 그것은 런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김우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번도 외국에서 살아본 적 없지만, 그/녀가 시선을 멈추었던 곳, 사람, 거리, 그리고 사물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김우진의 ‘지금, 여기’의 이야기는 어딘가에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김우진은 한국에 있다. 오랜 이방인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들어온 한국이 아마 한동안은 낯설어 스스로 또다시 이방인이 된 듯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떠나 있던 고국으로 돌아와 그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까. 자신이 처한 환경에 대한 참 예민한 시선, 그리고 군더더기 없이 ‘후욱~’하고 치고 들어가는 스타일이 과연 한국사회 안에서 어떻게 풀어질지. 여기, 이곳, 한국에서의 작업이 기대된다.